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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정(情)

윤변TV 2023. 2. 8. 12:19

한국말 중에 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 이 정()이란 단어는 참으로 번역하기 애매하다.  법정에서 그 놈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를 통역하는 사람이 한국인들의 어감에 맞게 판사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이 단어에 딱 맞아 떨어지는 영어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정에 합당한 영어 단어를 찾아 보면 대부분 sympathy, affection, mercy, benevolence, compassion, fellow feeling등이 나온다.  이중 한 단어 즉 Sympathy만 뽑아서 “Due to the very sympathy, I had no option but to do so”라고 번역해 봐야, “그 놈의 정 때문에에 녹아 있는 우리의 끈끈한 맛은 나지 않는다.  아마도 판사에게는 바로 그 동정심 때문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로 전달될 것이 뻔하다.  비록 의미 전달은 어느 정도 되었겠지만, 우리말 에 함축된 끈끈함을 판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어원적으로 Sympathy“Sym” (나누다)“Pathy” (고통)이 결합되여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의 진정한 뜻은 동정(同情)에 더 가깝다.  그러면 Compassion이라고 하면 어떨까?  이 말도 어원적으로 보면 “Com”(함께)“Passion” (고통받다)가 결합되어 더불어 아픔을 공감한다는 뜻이다. , 예수그리스도가 온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공감한다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연민(憐憫)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Mercy도 피조물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에 신의 은총을 뜻하는 자비(慈悲)라고 보아야 한다.  Affection은 이성적인 판단 보다는 심적으로 기우는 경향을 말하기 때문에 정애(情愛)에 더 가깝고, Benevolence는 선행을 희구하는 박애적인 인정(仁情)을 뜻하기 때문에 맞지 않고, Fellow Feeling역시 우정(友情)이란 뜻에 더 가깝기 때문에 도대체 한국어 을 액면 그대로 바꾸어 쓸 만한 단어가 하나도 없다. 

 

한국어의 정()이란 글자는 결국 한자 情에서 왔기 때문에 이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한자 情을 풀어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한자의 情은 원어적으로 마음 심()자와 푸를 청()자가 결합되어 있다.  다시 푸를 청()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파란 싹잎이 돋아나는 날 생()자와 샘을 나타내는 우물 정()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푸를 청()은 풀의 싹도 푸르고 샘물도 푸르다 해서 푸를 청()이 되었다고 하는데 국어국립원 표준대사전에서 푸르다라는 뜻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1」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

2」곡식이나 열매 따위가 아직 덜 익은 상태에 있다.

3」세력이 당당하다.

4(비유적으로) 젊음과 생기가 왕성하다.

5(비유적으로) 희망이나 포부 따위가 크고 아름답다.

6」공기 따위가 맑고 신선하다.

7」서늘한 느낌이 있다.

 

위의 정의를 보면, 푸를 청()은 푸르다라는 뜻의 색채어 어감보다는 그냥 맑고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뜻의 본질적 어감이 그 주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청심(靑心)이라고 할 때 이 푸를 청()의 의미 때문에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본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를 문자적으로 영역하면 Blue Mind가 되는데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영어의 Blue Mind는 한국어의 청심(靑心)과는 전혀 다른 우울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옛날 가수 조용필이 부르던 이란 노래가 있었다.  가사의 일부분을 들어보면 어쩌면 우리 한국인의 정을 이해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정이란 무엇일까? 주는 걸까? 받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워, 정에 울고, 정에 웃고. . .”

 

정에 얽혀 어쩔 수 없이 초래된 상황을 법정에서 판사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형사법정에서 한국인 피고인을 위한 변론은 호주인 변호사보다는 한국인 변호사가 훨씬 더 낫다고 자부한다.